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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데이트 - Commission_NH_님 커미션

KOHARU 2021. 1. 11. 23:31

To. KOHARU님                                                                                        © 2021. nihil. all rights reserved.

 

 

 

 

수업이 끝난 유메노사키 학원에서 또박거리는 느린 발소리가 나지막이 복도를 울렸다. 타박 타박 일정한 소리를 내며 걷는 여자아이의 백색의 머리카락이 발걸음에 맞춰 사뿐거리며 흔들 렸다. 소리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시라유키 아이리였다. 프로듀서임에도 그녀에게 빠진 아이 돌이 더러 있다고 하던가? 양손에 꼬옥 쥔 서류에는 ‘홍월’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녀는 담당 아이돌인 홍월의 프로듀스를 이제 막 끝내고 활동 내역을 정리해 이제 막 학생회실 로 향하는 중이리라. 그리고 그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듯, 그녀, 시라유키 아이리는 학생회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실례합니다.”

 

똑똑, 청아한 노크 소리가 울리고, 안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승낙과 함께 아이리는 학생회실로 들어갔다.

 

학생회장을 향해 형식적인 목례를 마친 아이리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저 사람은 어쩐 지 별로라는 그런 유치하고도 하등한 감 때문이었다. 어서 집에 가야지, 그런 생각으로 걸음 을 옮기던 그녀였지만 자신의 반을 지나갈 때는 다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흑발을 가진 아이가 교실에 남아있던 탓이다.

‘저 사람은…호쿠토 군이잖아?’

요즘 들어 자꾸 신경이 쓰이는 사람, 바로 히다카 호쿠토였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듯 그의 책상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이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살금살금 반으로 들어갔다.

“호쿠토 군.”

응, 친구니까. 친구니까 인사하는 것쯤이야. 아이리는 속으로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변명을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호쿠토는 그녀의 등장에 퍽 놀랐는지 경계하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뒤 를 돌아봤다가, 자신을 부른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자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손에 들고 있는 교과서로 보건데, 깜빡하고 놓고 온 책을 가지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 호쿠토 군? 누가 보면 귀신인 줄 알겠어.”

“뒤에서 갑자기 부르면 누구라도 놀랄 거야. 이 시간까지 프로듀스한 거야?”

“응, 곧 페스가 시작되니까. 다들 열심히 하더라. 트릭스타도 지금까지 레슨한 거 아니야?”

시라유키 아이리는 지금 이 시간이 좋았다. 레슨이 끝난 후, 아니, 꼭 그런 시간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저 이렇게 호쿠토와 소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아이리는 제법 아꼈 더랬다.

“뭐, 그렇지… 아 참, 시라유키.”

호쿠토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어쩐지 긴장한 기색인지라, 듣고 있던 아이리도 괜스레 자 세를 고쳐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왜 그래?”

“…이번 주 토요일에 바쁜 일 있어? 아버지가 연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연극 티켓을 줬거든.”

호쿠토가 주머니에서 연극 티켓을 두 장 꺼내 팔랑거렸다. 그 외의 수많은 말과 변명들이 아 이리의 귀를 스치고 갔지만, 호쿠토가 말을 꺼낸 이후부터 아이리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번 주 토요일이라면 시간 있어. 같이 보러 가자.”

생각해 보면, 단둘이 따로 만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같이 연극을 본다니. 이 건 데이트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금요일 저녁, 아이리는 그런 생각과 함께 옷장에 고개를 묻었다. 데이트라니. 히다카 호쿠토와 데이트라니! 아이리는 떨리는 숨을 애써 가다듬으며 옷 들을 헤집었다. 그렇게 많던 옷 중 왜 입을 것이 하나도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것도 별로… 이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좀 더 깔끔하고 세련되면서도 상대의 이목을 끌 만한 옷은 없을까? 그 외 세세하게 붙는 조 건에 딱 알맞은 옷이 있길 바라던 아이리는 30여 분간 옷장을 뒤집어놓다가, 결국 최후의 수 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시라베, 혹시 지금 바빠?”

아이리는 동생, 시라유키 시라베의 방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시라베는 침대에 앉아 핸드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아이리의 부름에 곧장 튀어 오르듯 달려갔다.

“전혀. 좀 쉬고 있었어. 무슨 일이야, 누나?”

“별 건 아니고…옷을 좀 봐줬으면 해서.”

옷?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동생에게 아이리는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호쿠토 군과 데이트 하기로 했는데, 뭘 입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다 이상해 보이고…”

아이리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방으로 앞장섰다. 그 탓에 그녀는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시 라베의 표정을 보지 못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순한 붉은 눈동자가 질투로 점철되는 것은 시라베가 숨기고 싶었던 표정이었으므로. 그러나 곧, 시라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돼먹 지 못한 놈이라면 모를까, 누나의 믿을 수 있는 친구라면 응원해주는 것도 동생으로서의 도리리라. 게다가 무엇보다도 누나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 사이를 방해할 이유는 없었다.

“후보는 있어?”

시라베는 아이리의 방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곳곳에 아이리가 고민한 흔적이 보이자, 시라베의 표정에 일순 당혹감이 스쳤다. 누나 정도면 패션 감각도 상위 10%에 속할텐데도 이렇게 고민하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누나를 이렇게 만든 호쿠토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응, 몇 개 골라놓긴 했어.”

아이리는 대답하며 몇 가지 조합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아니면 이렇게 생각 중인데, 어때? 보 기에도 깔끔한 조합이었건만, 아이리는 영 자신없는 표정으로 시라베를 올려다보았다.

“다 잘 어울려, 누나. 그럼 이 중에서…”

시라베는 옷을 들어 아이리에게 대보았다. 역시 우리 누나는 옷 고르는 센스 하나는 탁월하다 니까. 그런 흐뭇한 미소를 남몰래 짓기도 하였다.

“누나는 무녀 이미지가 강하니까 그 점을 살리는 게 좋겠어. 그쪽이 누나랑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시라베는 말을 이어나가며 옷 두 개를 가리켰다.

“이거랑 이게 좋을 것 같은데? 응, 이거면 될 것 같아.”

“고마워, 시라베.”

“뭘. 데이트 잘하고 와, 누나.”

시라베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아이리는 시라베가 골라준 나풀거리는 하얀 셔츠와 붉은색 스커트를 보며 마침내 미소 지었다. 완벽해, 이걸로 내일 준비는 끝이다! 역시 시라베에게 도움을 구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결 상쾌해진 아이리에게 이제 남은 것 은 꺼내놓은 옷가지들을 도로 정리하는 일뿐이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현재, 토요일 오전이 밝았다. 바로 오늘, 대망의 히다카 호쿠토 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난 아이리 는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왕 일찍 일어난 거, 일찍 준비하자. 허겁지겁 가는 것보단 낫지.’

긍정적인, 혹은 자기암시로 중얼거린 아이리는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와 졸린 눈을 비비며 화 장실로 향했다. 오늘 아침을 뭘까, 그런 소소한 생각과 함께. 미소 된장국과 나물 비빔밥으로 하루를 시작한 아이리는 일찍 일어난 덕택에-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여유 있게 밖으로 나왔다. 햇살은 화창하고, 바람도 적당히 선선했다. 일기예보에 서는 하루 종일 맑을 예정이라고 했다. 최고의 날이었다.

“호쿠토 군, 여기야.”

아이리는 저 멀리 다가오는 호쿠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꽤 이른 시간에 나온지라 오래 기다릴 것을 예상했음에도, 호쿠토가 빨리 나온 것에 퍽 놀란 눈치였다.

“시라유키… 빨리 나왔군. 나도 이른 시간에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기다렸나?”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호쿠토 군이야말로 빨리 나왔네.”

“네가 더 빨리 나와 놓고 무슨 소리야. 조금 이르지만 출발할까.”

아이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날 밤 찾아봤던 설명을 되짚었다. ‘닿지 않는 사랑’이라고, 분 명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티프가 되었던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라고 했던가. 확실히 연극에 도움이 될 법한 연극이었다. 연극에 대한 기대 반, 호쿠토와의 데이트에 대한 기대 반으로 아 이리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이리는 연극 티켓을 유심히 살펴보며 걸어갔다. C열 11. 세이야답게 로얄석이었다. 아이 리는 기대되는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이 연극은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라며?”

“아아, 그렇다는군. 꽤 재미있는 모양이야.”

호쿠토가 팸플릿을 펼쳐 읽었다. ‘바빌로니아 세미라미스 여왕 시절에 피라모스라는 청년과 티스베라는 처녀가 살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한눈에 반했으나 양가의 사이가 좋지 않 아…’ 라면서 간단한 줄거리와 함께 배우들의 얼굴과 배역, 그리고 무대 장면 몇 개가 실려있 는 흔한 팸플릿이었다. 어깨 너머로 곁눈질하며 팸플릿을 보던 아이리는 손가락으로 티스베 배우를 가리켰다. 이 사람, 평이 되게 좋대. 그런 말을 하는 아이리의 눈빛은 기대로 반짝거렸 다. 호쿠토는 말없이 부디 연극이 그를 만족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슬슬 시작하려나 봐, 호쿠토 군.”

공연장 불이 하나둘 꺼지는 것을 보고 아이리가 작게 속삭였다. 과연 그 말대로, 불이 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나와서 공연 전 간단한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공연 중 전화 하지 말아달라거나, 너무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말아 달라는 등 기본적인 사항들이었다. 아이 리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무대를 응시했다. 곧 그가 기대하던 공연이 시작할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연 세이야 씨가 준 티켓이었다. 그 감동을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이리는 급기야 곁에 호쿠토가 있는 것도 있고 연극에 몰입했다. 티스베 역의 배우가 하는 손짓 하나, 숨소리 하나마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완전한 티스베 그 자체였고, 자신 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연극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아이리는 제 곁 에서 누군가 자신을 곁눈질한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한편 히다카 호쿠토는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다. 배우들이 무어라 이야기하는 소리는 들렸지만, 지금 그의 관심은 온통 시라유키 아이리에게만 몰려있었다.

그녀는 지금 티스베의 연기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마치 정말 배우가 정말로 티스베인 양 눈을 반짝이며 보는 모습은 새삼 호쿠토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호쿠토는 그런 아이리가 좋았 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는 아이리가. 호쿠토는 제 입술을 짓이기더니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아이리가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호쿠토의 생각보다도 몹시 놀랐다. 하지만 다 행히도,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 직전에 제 옆자리에 누가 앉아있었는지 기억해냈다. 연극에 몰 입하느라 데이트 상대를 잊어버린 것은 제 불찰이었다. 아이리는 호기심 반, 미안함 반으로 호쿠토를 돌아보았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며 연극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리는 그 어 두운 공간 속에서 붉어진 귀를 놓치지 않았다. 괜한 부끄러움에 아이리는 제 얼굴도 같이 달 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배우들의 연기가 그저 말소리로 변하고, 깔리는 배경음악이 그를 위한 소리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재, 재미있었네, 호쿠토 군. 즐거웠어.”

아이리는 떨리는 음성을 애써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가 손을 겹쳐온 이후로 어떤 내용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큰 소리와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 기, 그리고 두근거리는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 그때가 떠오르면 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시라유키, 돌아가기 전에 조금 걸을까?”

그날, 그 데이트 제안처럼 아이리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를 거절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응, 그게 좋겠어. 가자.”

아이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뿐이었다.

“…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무심코 탄성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지, 라 고 채 묻기도 전에 호쿠토는 그녀가 탄성을 내지를 이유를 찾았다. 눈이었다. 눈이 오고 있었 다. 호쿠토는 손을 뻗어 손에 눈을 담았다. 새하얀 눈은 그의 체온을 차마 버티지 못하고 그 의 손에서 금방 물이 되어 녹아 사라졌다. 보아하니 쌓이는 눈은 아닌 모양이었다.

“쌓이는 눈은 아닌가 봐…”

조심해, 라고 말하려던 호쿠토는 그대로 멈춰 섰다. 아니, 사실 그는 그가 멍하니 서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이 순간 히다카 호쿠토의 모든 의식과 감각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새하얀 눈들 사이로 보이는 백발이 눈을 맞아 반짝반짝 빛났다. 아름다움을 넘어 황홀한 순간이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아이리의 입이 벙긋거렸다.

“…토 군, 호쿠토 군.”

종이 달그랑, 달그랑 치는 듯한 광경에서 잔잔히 울린 것은 타박하는 음색이었다. 호쿠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무심코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아, 시라유키. 미안, 뭐라고 했지?”

“그냥, 눈이 쌓이지 않을 것 같다고 해서 아쉽다고 했어. 넋 놓고 있던데, 눈을 보면 생각나는 추억이라도 있어?”

아이리는 두 눈을 곱게 휘며 물었다. 생각나는 추억이라. 호쿠토는 가만히 그 말을 곱씹었다.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이제부터 생길 것 같아.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어, 그 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눈이 예뻐서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야. 미안하군.”

“괜찮아. 나도 예쁘다고 생각했으니까.”

호쿠토 군, 다시금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리는 호쿠토를 향해 돌아서면서 미소 지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부드러이 내뱉는 말이 수줍다. 호쿠토는 잠시 무어라 대답 할지 고민하는 듯 말이 없다가, 이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말로 즐거웠어.”

너는 나를 늘 곤란하게 만들어. 네 미소 하나면 이 세상이 따뜻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 부 사라지고 오로지 너만 내 눈에 보여.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 알아. 그런 너를 내 가 온전히 가질 수 있을까?

“시라유키!”

그 이름을 부르면, 아이리는 언제나 뒤돌아보며 말했다. 왜, 호쿠토 군? 자신을 보며 지어주는 그 미소 하나면 호쿠토는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만다. 늘 그랬고,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슬슬 돌아가자.”

하지만 그럼에도 좋아한다고, 호쿠토는 아직 전하지 못할 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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